친구 단상

이렇게 이 사람이랑 영영 연락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자 두려웠다.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과 싸웠을 때 드는 괴로움과 비슷하지만 가족은 그래도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깔려 있는데, 친구는 아무리 가족같은 관계더라도 막상 사이가 틀어지면 되돌릴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어서 더 무섭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여기서 내가 무언가 함으로써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면서 완전히 내려놓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오랜 관계는 그렇게 쉽게 깨질 수 없다는 걸 확인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서로 알고 지낸 15년 동안 세상도 많이 바뀌었고 우리 각자도 많이 바뀌었다. 앞으로 세상과 우리는 또 얼마나 달라질까. 과거에 아주 중요했던 것들 중에 지금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진 것들을 생각하면, 모든 게 우습게 느껴진다.

여중생 A, 진로고민 단상

남편이 재밌다며 추천할 땐 흥미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쿠키를 사서 보고 있는 웹툰이다. 작가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분일까? 너무 공감되는 추억의 환경이어서 완전히 몰입해서 보고 있다. 치기 어리고, 남의 입장을 생각해주기엔 너무 어린 아이들이 모여서 이루는 사회. 그 사회에서 제대로 잘 적응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주인공도 그렇겠지만, 나 역시 중고등학교 시절로는 조금도 돌아가고 싶지가 않다. 주인공처럼 집안 환경이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 다른 동갑내기 친구들과 한 반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이야기에서 뚜렷이 보여주고 있듯 다양성을 인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끊임 없이 서로를 비교하고 다름을 깎아내리고 상처 주고 상처 받음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좋은 일도 물론 있었겠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내년엔 어떻게 해야 할까. 첫 2개월이 힘들다더니 정말 처음이 힘들었고 지금은 꽤 지내기 편하다. 적응이 힘든 것도 있지만, 처음에 시키는 일이 많았고,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상대적으로 일이 적게 느껴진다. 일 년은 정말 짧은 것 같다. 적응할 즈음 되면 끝나 버린다. 여기는 수요가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벌써 내년 계획을 물어보시기 시작했다. 내가 지방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꽤 좋은 기회들이 열려 있을 것 같은데, 아기는 친정에 맡긴 채 이제 막 어린이집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친정 근처인 이 집이 남편도 군병원으로 출퇴근하기엔 최적의 위치여서 나는 당분간은 이동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통근이 가능한 병원들은 대부분 큰 병원이라 어딜 가든 고생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이제는 일찍 퇴근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해보고 싶다. 나와 맞는 사람을 과연 만날 수 있을까 막막했던 스물 여섯에 나에게 준비된 것 같았던 남편을 만났고 지난 5년 그래도 힘들지 않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내 능력 덕이 아니었다. 역시. 기도해야겠다.

자기중심적인 사람 단상

윗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자기중심적일까. 본인이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이상 그 환경이 어쩔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것 같다. 전공의 한 년차만 올라가도 1년차 때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사악한 면모를 새로 생긴 후배들에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십 년 이상 윗 사람의 터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 온 사람이 자기중심적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자신이 아무리 잘못해도 누구도 쉽게 그 잘못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럴 계기를 찾기가 힘들 것 같다. 아랫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그의 입장에 맞추어 생각하고, 그의 말을 되내이며 인정해주고, 체념할 뿐이다. 처음엔 이 사회 안에서 그의 말이 갖는 신적인 권위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그의 말을 믿고 나를 탓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잘못 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쓰러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내가 그렇게 못나지 않았다는 근거를 찾으려고 애쓴 결과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고 의연하게 버틸 것이다.

고비 단상

우울하다.
J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남들이 말하는 대로 J도 감기에 걸리기 시작했다. 한국 엄마들이 아기들 열 나는데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했는데, 열이 나면 그 다음 sequale가 예측이 되니까 나도 그렇게 된다. 아무 것도 없이 열이 날 때는 뭔지 몰랐는데,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감기 증상들의 행진-밥을 안먹고 눈곱, 콧물, 기침, 열로 괴로워하는 것을 함께 괴로워하는 것이 어김 없이 찾아온다. 나도 여행도 가고 싶고 한가롭게 TV도 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여름 날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쇼핑도 하고 싶고 영화관도 가고 싶다. 주중에는 새벽 일찍 일어나 출근해서 할 수 있는 만큼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J와 최대한 시간을 보내는 삶에 충분히 만족하고 감사했었는데, 나도 몸이 안좋으니까 자꾸 기분이 다운되는 것 같다. J의 감기에 온 가족이 옮았다. 나는 그저께부터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데, 병원에서는 성대가 부었다고 했다. 내가 느끼는 통증은 없는데 증상이 심각하니까 이상하다. 며칠동안 말을 못하니까 너무 답답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이러다가 말을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동안 운동을 쉬었었는데 아무래도 이제 다시 해야겠다. 눈에 띄게 살이 붙은 것은 아니지만 운동까지 못하니까 정말 닭장 속에 갖혀사는 기분이 든다. 혼자 살면서 일만 하거나 일 안하고 아기만 보면 꽤 할만 할 것 같은데. 나는 둘 다 잘하는 것도 아닌데 같이 하려니까 버겁다.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은 그래도 여행도 가고 아기 데리고 놀이동산도 가고 해외학회도 다녀오고 하는데, 나는 사실 여행까지 계획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같이 있는 언니는 크리스마스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몇 년이 더 지나면 지금보다 행복해질 수 있을까. 설마 내 인생에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니겠지.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겠지. 누가 얘기해주는 게 아니니까 잘 모르지만, 아마도 지금이 내 인생의 고비 중의 하나인 것 같다. 나도 이 기간이 무사하게 끝났으면 좋겠다. 일단 목소리가 어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깨고 나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단상

그 사람은 곰인형 두 개를 만들어 주었다. 하나는 한복을 입은 곰이었고 또 하나는 좀 더 대중적인 남색 옷을 입은 세련되어 보이는 곰이었다. I언니에게 선택권을 주었는데 망설이는 듯 하더니 세련된 곰을 골랐다. 별 상관 없어서 한복 곰을 받기는 했지만 왠지 아쉬웠다. 그래서 그걸 생각하고 있는데 잠이 깨었다. 펑! 곰 인형들은 전부 사라졌고, 어떤 곰인형을 가졌든지, 곰인형을 받지 못했든지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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